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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직장인이 한 시간가량 미팅을 이어 가던 중 문득 상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2시 반이네요. 식사하러 갑시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가 출출한 걸 보니 그쪽도 배가 고플 것 같네요.
- 제가 배가 고파서 통 집중이 안 됩니다.
- 이렇게 진 빠지는 미팅, 이제 그만합시다.
- 아무리 이야기해 봤자 해결책은 안 나올 것 같으니 밥이나 먹읍시다.
- 여기서 해결책이 안 보이지만 식사를 하다 보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 성과가 이렇게나 많으니 우리 같이 식사하며 축하합시다!
- 보아하니 그쪽도 이런 식의 미팅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 그만합시다.
- 업무가 아무리 중요해도 나는 당뇨 환자라서 식사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12시 반이네요. 식사하러 갑시다." 우리는 이런 식의 말을 예사로 쓰면서 당연히 상대가 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대는 이 온갖 의미 중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하고 역시나 당연히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가 다반사인 것도 어지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150년 전에 이미 그 사실을 알아서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사람 좋은 피에르 백작의 입을 빌려 그 진리를 전했습니다.
처음 이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피에르는 인간의 정신이 무한히 다채로워 어떤 진리도 두 사람이 똑같이 설명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척 놀랐다.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 해도 단 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설득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의 생각을 자기 방식대로 줄이고 바꾸어서 이해했다.
어떤 생각이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신이 이해한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2003)에서 인용-
우리 정상인은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필요한 언어의 온갖 가능성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매일 피에르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존 맥스웰 쿠체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여기에 말 그 자체가 있다. 그다음(그 말 뒤편 또는 말 사이 또는 말 아래)에 의도가 있다."
우리는 벽을 사이에 두고서 모스부호 같은 기호를 벽에 두드려 대면서 소통하는 것 같습니다.
치매 환자는 의도를 표현할 언어 재료가 더 한정적입니다.
어떨 때는 아예 우리가 모르는 언어를 쓰는 사람 같습니다.
당연히 우리로서는 이 "(낯선) 혀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 커다란 도전이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작가 마이클 이그나티예프는 이렇게 표현한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들은 저 먼 곳에서 산다. 그들이 그곳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다."
치매 환자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말은 정서적 종류의 메시지일 때가 많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앞서 소개한 "식사하러 갑시다."라는 문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말 뒤편에도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어떤 감정(짜증, 권태, 절망, 행복, 단호함, 무관심 등)인지는 화자의 메시지나 의도에 달려 있습니다.
반대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장을 듣고서 어떤 의미를 읽어 내야 할지, 그것 역시도 문장 뒤에 숨은 감정에 달린 것입니다.
치매 환자가 무슨 말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투르게 표현된 환자의 객관적인 언어 뒤편에는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매일 자식들이 보러 오는데도 환자가 "애들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들 보고 싶으세요?" 환자의 이 말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그리움의 감정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나 집에, 엄마한테 갈 거야."라고 말한다면 엄마는 진즉에 돌아가셨다는 지적 대신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어머니 이야기 들려주세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식의 대답으로 말 뒤편에 숨은 감정의 메시지를 파악하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 환자는 훨씬 빨리 진정될 것입니다.
물론 잠시 후면 다시 똑같은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환자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으니까요.
자식을 찾거나 출근을 하려는 치매 환자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 뒤편에는 다시금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자식을 찾거나 출근을 하겠다는 말은 필요 있는 인간, 유용한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의 표현입니다.
이럴 때는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간접적으로 환자를 칭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참 고생하셨다, 자식을 참 훌륭하게 키우셨다며 직접적으로 환자를 칭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환자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찾아내기란 참으로 힘듭니다.
아마도 환자와의 소통에서 가장 힘든 부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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